줄탁동시- Sucking and pecking at the same time.
啐啄之機 = 啐啄同時
啐 - 떠들줄 빠는소리줄 / 옥편에는 맛볼쵀
啄 - 쫄탁
語源
宋나라 碧巖錄의 佛書 公案集의 하나
⮡❶ 스승과 제자(수행자)의 문답
❷ 공공의 문서로 선문답
擧僧問鏡淸 學人啐 請師啄 / 擧-제시하다
한 수행자가 경청스님에게 학인이 줄 하겠으니 스님께서 탁 하여 주십시오
줄탁동시의 조건
❶적극성 ❷준비성 ❸적시성 ❹관계성 ❺동시성
★禪家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서로 응하는 일
★사제간의 인연이 어느 기회를 동시에 맞아 더욱 두터워지는 것
★전하여 놓쳐서는 안될 좋은 시기를 비유
★한편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지칭하기도 함
鏡淸스님 - 行脚수행으로 유명
鏡淸啐啄 – 경청스님의 안팎 쪼기
줄탁의 작용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衲僧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어미닭이 쪼려하면 병아리가 쪼지 않을 수 없고
병아리가 쪼려고하면 어미닭이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함
衲僧 -衲衣를 입은 승려라는 뜻으로 중을 이르는 말
衲衣란 세상사람들이 입다 버린 낡은 헝겊들을 모아 기워만든 옷
그래서 납자는 세상 떠날 때 짐이 한 결망을 넘어서는 안된다
쓰던 鉢盂와 낡은 家事, 長衫만을 남기고 죽음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극락세계로 간다
衲 꿰매다 /기웠다는 뜻 衲僧=衲子
“줄탁동시(啐啄同時)”는 『벽암록』 제16측에 나오는 공안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주로 선종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 내용인즉, 닭이 알을 품었다가 달이 차면 알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그 반대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병아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다시 말하면 안팎의 두 존재의 힘이 함께 알 껍질에 작용될 때라야 비로소 병아리는 온전한 생명체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모든 생명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삶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선가(禪家)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어미 닭이 소중하게 알을 품듯이, 스승이 제자를 끊임없이 보살펴서 그 근기가 무르익었을 때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주는 겁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갈(喝)이라든가, 봉(棒)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제자의 근기(根機)에 맞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喝 - 꾸짖을 갈 / 목멜애 恐喝 棒 - 막대봉 / 때리다 針小棒大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기가 올 때까지 제자는 오매불망 정진에 힘써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와 같이 스승과 제자의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겁니다. 요컨대 사제간의 인연이 어느 기회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선가에서는 ‘줄탁동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선가의 지도법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라, 현대 교육에서도 참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스승은 제자를 위하여 참되게 “탁”을 해 줄 수 있는 안목과 지도가 절실히 요망되고, 제자 또한 스승을 존경하고 학업과 인격도야에 전념하여 언제라도 “줄”을 할 수 있는 요건을 구비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음은 윗글에 대해 사족을 달자면....
원래 중국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임제종(臨濟宗)의 공안집(公案集:화두집)이자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불서(佛書)인 송(宋)나라 때의 《벽암록(碧巖錄)》에 공안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깨우침을 위한 물음의 요체이자 수수께끼로, 책으로 말하면 제목과 같은 것이다.
선을 수행하는 승려들은 하나의 공안만 가지고도 평생을 參究하기도 한다.
그만큼 몇 자 안 되는 공안일지라도 그 속에는 깨달음의 이치가 숨어 있어 그 뜻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공안의 원래 뜻이 공공기관의 문서라는 점에서 보면, 일단 깨닫기만 하면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그 뜻이 명백해지는 것이 공안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문자의 뜻에 얽매이는 순간 깨달음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다시 관념에 빠진다. 선종에서는 이러한 관념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공안은 최소한의 언어만을 사용한다.
줄탁동시 역시 깨우침과 관련된 공안이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오려면 먼저 스스로 알을 깨기 위해 부리로 알을 쪼아야 한다.
그러면 알을 품던 어미닭이 소리를 알아듣고 동시에 밖에서 알을 쪼아 안팎에서 서로 쪼아댄다.
여기서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이고,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주는 스승이다.
새끼와 어미가 동시에 알을 쪼지만, 그렇다고 어미가 새끼를 나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미는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작은 도움만 줄 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새끼 자신이다.
이 말은 스승은 깨우침의 계기만 제시할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에도 때가 있어 깨달아야 할 때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내부의 힘과 외부의 힘의 조화라고 볼 수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하려면 안쪽에서 부리로 알을 쪼아야한다 어미 닭은 그 모습을 보고 밖에서 같이 쪼아준다
그러면 알이 갈라지면서 병아리가 순조롭게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만일 어미 닭이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알을 쪼이댔다가는 병아리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반대로 병아리가 나오려고 안에서 열심히 알을 쪼아대는데 어미닭이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병아리는 숨이 막혀 죽고만다
스포츠도, 가정도, 조직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지쳐서 쓰러질 수도 있다
과거에는 거의 제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의지가 약한 요즘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달래고 채찍질 하면서 키워가야한다
모르는데 왜 모르냐고 윽박을 지를 일도 아니지만 정신을 못차리면 따끔하게 주의도 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