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01子曰,“魯衛之政,兄弟也.”
子曰 魯衛之政 兄弟也
공자 가라사대 “노나라와 위나라의 政事가 형제로다.”
<家苑 註 >
중국에서는 周나라 무왕(武王)이 전국을 통일하면서(기원전 1046년)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무왕은 주공 강숙 등의 형제를 비롯한 친족들과 태공망 등 개국공신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봉토(封土)라 한다.
주공(周公)의 아들인 백금(伯禽)의 봉토가 노(魯)나라이며, 衛(위)나라는 주공의 동생인 강숙(康叔)의 봉토이다.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문왕과 무왕과 주공의 통치철학을 이어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강태공(姜太公), 곧 태공망(太公望)은 제나라를 봉토로 받았다. 이후 주나라가 쇠퇴하면서 각 봉토는 독립적인 제후국가가 되었는데 이때를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년)라 한다.
춘추시대를 전후로 한 철기생산은 농업생산력과 무기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를 바탕으로 각 제후국들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약육강식의 쟁탈전이 심해졌다. 또한 각 제후국 내에서는 경대부 가신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노나라는 대부인 계손씨가 군주인 昭公을 쫓아내고는 定公을 세웠다(기원전 509년). 이로부터 노나라는 계씨가문이 권력을 장악하여 농단하였는데, 공자가 이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내용이 팔일편 첫 장과 둘째 장이다.
위(衛)나라의 경우, 영공(靈公)의 아들인 괴외(蒯聵:莊公)와 괴외의 아들인 첩(輒:出公), 곧 父子 사이에 군주 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술이편 14장, 자로편 3장 참조). 같은 뿌리에서 나온 노나라와 위나라 양국에서 벌어지는 권력쟁탈전으로 인해 양국이 모두 국정농단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에 공자가 ‘두 나라의 정사가 형제같이 닮았다’고 탄식한 것이다.
魯周公之後衛康叔之後本兄弟之國而是時衰亂政亦相似故孔子嘆之
주자
魯는 周公之後요 衛는 康叔之後니 本兄弟之國이오 而是時에 衰亂하여 政亦相似라 故로 孔子嘆之시니라
노나라는 주공의 후손이오, 위나라는 강숙의 후손이니 본래가 형제의 나라이고, 이때에 쇠하고 어지러워 정사가 또한 서로 같았으므로 공자가 탄식하심이라.
蘇軾
是歲는 魯哀公七年이오 衛出公五年也라 衛之政은 父不父子不子요 魯之政은 君不君臣不臣이니 卒之哀公은 孫于邾而死于越이오 出公은 奔宋而亦死于越이니 其不相遠如此라
이 해는 노나라 애공 7년이고, 위나라 출공 5년이라. 위나라의 정사는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였고, 노나라의 정사는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했으니, 끝내 애공은 주나라로 달아났다가 월나라에서 죽고, 출공은 송나라로 도망갔다가 월나라에서 죽으니, 그 서로의 멀지 않음(비슷함)이 이와 같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