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불비 周而不比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군자는 여러 사람과 두루 친하면서 특정사람과 결탁하지 않고 소인은 특정 사람과 결탁하여 두루 친하지 못한다
군자는 다른 사람과 두루 친하게 지낸다.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고 존재 의미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특정 사람만 만나 어울리면 편가르기를 하지 않죠
소인은 자기와 친한 사람과 결탁하고 생각이나 성향이 다르면 피한다. 심하면 다투고 공격하죠. 니체는 이런 사람을 노예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믿음이 부족하기에 편을 가르고 남을 공격한다. 반면에 자기를 긍정하고 타인도 수용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했다. 스스로 만족하기에 다른 사람의 삶도 응원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 주인 혹은 군자이다
군자의 큰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은 단위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범주라고 한다. <나>는 작은 범주이다. 이 범주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고려한다. 너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라는 범주를 얻는다. 우리와 너희를 묶으면 ‘사람’이 되고 사람을 넘어서면 ‘생명’의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다
나와 너를 넘고 보수와 진보를 넘어 사람 혹은 생명이라는 큰 범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은 자기를 보살펴준 미리엘 주교의 은그릇을 훔칩니다. 얼마 후 경찰에게 붙잡혀 온 장 발장을 보며 미리엘 주교는 경찰에서 은그릇은 자기가 준 것이라고 말한다.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주죠 장발장이 물건을 훔쳤지만 본래 나쁜 사람이 아니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도둑이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본능에 충실하며 자기 이익에 따라 살아왔던 장발장은 주교의 배려 덕분에 양심이 되살아 난다. 은그릇을 판 돈으로 사업에 성공해서 평생 좋은 일을 실천하죠. 죽을 때까지 주교가 준 은촛대를 소중히 간직하다가 그 촛불 아래서 명을 다한다.
장발장을 구원한 것은 미리엘 주교의 克己復禮였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넘어 타인의 상황을 생각하고 올바름을 따른다. 그 덕분에 세상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군자가 존경받는 이유이다
공자의 품격
현대인은 행복을 위해 사는 것 같다. 그런데 행복이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요? 공자는 “군자는 늘 평온하고 느긋하지만 소인은 늘 근심에 싸여 있다”라고 한다 군자가 평온하고 느긋한 이유는 올바르을 행하기 때문이다. 소인이 근심에 싸여 있는 까닭은 눈앞의 이익을 놓칠까, 혹시나 손해 볼까 노심초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克己復禮의 길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석문이라는 곳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곳의 문지기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공씨 문하에서 왔습니다.”
자로의 대답을 들은 문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그 사람 말이군요,” -논어-
공자는 실패한 정치가였다. 그 당시 문지기조차 공자를 비현실적인 일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인과 얘가 통하는 대동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안 된다 싶은 일은 안 한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여긴다. 훌륭한 사람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한다. 불가능한데도 도전한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옳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선의지’라고 했다. 옳기 때문에 마당히 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르려는 의지이다.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고 <논어>가 고전으로 여전히 널리 읽히는 이유는 그가 남긴 놀라운 업적이나 문장의 뛰어남 때문이 아니다. 자기 이익을 넘어 세상을 위한 행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군자의 품격을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이죠
<논어>에서 스승을 오랫동안 지켜본 제자들은 공자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자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셨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셨다 –논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철학에 따라 묵묵히 길을 가는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공손과 온화함, 이것이 공자의 품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