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이인편 제 15 장04-15-01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논어 이인편 제 15 장
04-15-01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제15장) — 공자의 도(道)는 충서(忠恕) 하나로 꿰어진다
04-15-01 子曰 參乎아 吾道는 一以貫之니라 曾子曰 唯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道)는 하나로써 꿰뚫느니라.” 증자(曾子)는 “예!” 하고 재빨리 대답하였다.
參乎者呼曾子之名而告之貫通也唯者應之速而無疑者也聖人之心渾然一理而泛應曲當用各不同曾子於其用處蓋已隨事精察而力行之但未知其體之一爾夫子知其眞積力久將有所得是以呼而告之曾子果能黙契其指卽應之速而無疑也
參乎者는 呼曾子之名而告之라 貫은 通也라 唯者는 應之速而無疑者也라 聖人之心이 渾然一理하야 而泛應曲當하야 用各不同하니 曾子 於其用處蓋에 已隨事精察而力行之시되 但未知其體之一爾라 夫子 知其眞積力久하야 將有所得하고 是以로 呼而告之하시니 曾子 果能黙契其指하야 卽應之速而無疑也시니라
삼호라는 것은 증자의 이름을 불러서 일러주심이라 관은 통함이라 유라는 것은 대답을 속히 하고 의심이 없음이라 성인의 마음이 하나의 이치로 혼연하여 범범히(모든 것을 띄어놓아)은하고 곡진히 마땅하여 쓰는데는 각각 같지 아니하니(체는 같지만 용은 같지 않음)증자가 그 쓰는 곳에 대개 이미 일에 따라 정밀히 살피고 힘써 행하셨으되 다만 그 체의 하나를 알지 못하니라
04-15-02子出,門人問曰,“何謂也?”曾子曰,“夫子之道,忠恕而已矣.”
04-15- 02 子 出커시늘 門人이 問曰 何謂也잇고 曾子曰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니라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唯’는 어른의 말씀에 ‘네!’하고 재빨리 대답할 때 하는 말이다.
· ‘忠恕而已矣’에서 ‘忠’은 ‘中’과 ‘心’의 합체어이므로 ‘속에 있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본래 마음속에 있는 마음은 인(仁)이고 성(性)이다. ‘남을 나처럼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인(仁)이라 하고, ‘살려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성(性)이라 한다.
· ‘恕’는 ‘속에 있는 마음은 남의 마음과 같은 것’이므로, ‘여(如)’과 ‘심(心)’, 즉 서(恕)라고 한다. 속에 있는 마음인 충(忠)이 밖으로 나타날 때 서(恕)가 되는 것이다.
· ‘而已矣’는 한정을 나태내는 어조사 ‘~하고 그만이다.’ 즉 ‘~일 뿐이다’로 해석한다.
사람의 지(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험을 통하여 쌓아가는 지(知)이고 다른 하나는 타고난 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는 지(知)다. 전자의 지(知)는 쌓을수록 많아지지만 후자는 지(知)를 쌓는 것이 없다. 그것은 느낌으로 전달된다. 느낌을 온전히 갖추고 있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적용된다. 이것이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다.
증자는 공자의 말씀을 알아듣고 재빨리 대답하였으나 다를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증자에게 물었다. 본마음은 남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므로 본마음을 따르면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남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본마음을 실천하면 거기에 나오는 지적(知的) 능력으로 모든 일에 자유자재로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증자는 충서(忠恕)로 대답했다.
盡己之謂忠推己之謂恕而已矣者竭盡而無餘之辭也夫子之一理渾然而泛應曲當譬則天地之至誠無息而萬物各得其所也自此之外固無餘法而亦無待於推矣曾子有見於此而難言之故借學者盡己推己之目以著明之欲人之易曉也蓋至誠無息者道之體也萬殊之所以一本也萬物各得其所者道之用也一本之所以萬殊也以此觀之一以貫之之實可見矣或曰中心爲忠如心爲恕於義亦通○程子曰以己及物仁也推己及物恕也違道不遠是也忠恕一以貫之忠者天道恕者人道忠者無妄恕者所以行乎忠也忠者體恕者用大本達道也此與違道不遠異者動以天爾又曰維天之命於穆不已忠也乾道變化各正性命恕也又曰聖人敎人各因其才吾道一以貫之惟曾子爲能達此孔子所以告之也曾子告門人曰夫子之道忠恕而已矣亦猶夫子之告曾子也中庸所謂忠恕違道不遠斯乃下學上達之義
盡己之謂忠이오 推己之謂恕라 而已矣者는 竭盡而無餘之辭也라 夫子之一理渾然而泛應曲當은 譬則天地之至誠無息而萬物이 各得其所也라 自此之外는 固無餘法이오 而亦無待於推矣라 曾子 有見於此而難言之라 故로 借學者盡己推己之目하야 以著明之欲人之하시니 易曉也시니라 蓋至誠無息者는 道之體也니 萬殊之所以一本也오 萬物各得其所者는 道之用也니 一本之所以萬殊也라 以此觀之컨대 一以貫之之實을 可見矣라 或이 曰中心爲忠이오 如心爲恕라하니 於義亦通이라 ○程子曰 以己及物은 仁也오 推己及物은 恕也니 違道不遠이 是也라 忠恕는 一以貫之니 忠者는 天道요 恕者는 人道며 忠者는 無妄이오 恕者는 所以行乎忠也라 忠者요 體요 恕者는 用이니 大本達道也라 此與違道不遠異者는 動以天爾라 又曰維天之命이 於穆不已는 忠也오 乾道變化에 各正性命은 恕也라 又曰聖人敎人에 各因其才하시니 吾道一以貫之는 惟曾子爲能達此니 孔子所以告之也시니라 曾子 告門人曰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하시니 亦猶夫子之告曾子也라 中庸所謂忠恕 違道不遠은 斯乃下學上達之義니라
-어길위 떠날위 다를위 미적미적할위
내몸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 이르고 내몸 미루는 것을 서라 이르니라 而已矣라는 것은 다하고 다하여 남음이 없음을 말함이라 부자가 하나의 이치로 혼연하여 범범히 응하고 곡진히 합당한 것은 비유하면 천지의 지극한 정성이 쉬임이 없어(중용26장 참고) 만물이 각각 그곳을 얻음이라 이로부터 밖에는 (이밖에는)진실로 남은 법이 없고 또한 미룸은 기다릴 것도 없느니라 증자가 이에 봄(깨달음)이 있으나 말하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자기 몸을 다하고(忠) 몸을 미루는(恕)조목을 빌려서 써 나타내 밝히시니 사람들이 깨닫기 쉽게 하고자 하심이라 대개 至誠無息이라는 것은 도의 본체이니 만가지로 달라지는 것이 써 한 근본이요 만물이 각각 그곳을 얻는 것은 도의 씀이니 한 근본으로써 만가지로 달라지는 것이라 이로써 보건데 하나로써 꿰어 통했다는 실제를 가히 봄이라 혹이 가로대 가운데 마음이 충이 되고 마음과 같이 한다는 것이 서라하니 의에 또한 통함이라
정자[程明道]가 말하였다. “자신으로부터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침은 서(恕)이니,『중용(中庸)』에서 ‘충(忠)과 서(恕)는 도(道)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다.(도에 감이 멀지 않다) 충(忠)과 서(恕)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니, 충(忠)은 천도(天道)이고 서(恕)는 인도(人道)이며, 충(忠)은 무망(無妄)이고 서(恕)는 충(忠)을 행하는 것이다. 충(忠)은 체(體)요, 서(恕)는 용(用)이니, 대본(大本)과 달도(達道)이다. 이것이 (중용의) ‘도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과 다른 것은 동(動)하기를 하늘[自然]로 하기 때문이다.” 정자가 말했다. “‘하늘의 命 이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忠 이요,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기 성명(性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서(恕)이다
정자부터의 해석-주역의 乾卦 彖傳 중용제1장 4절 제26장 참고
또 가라사대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각각 그재주를 인하시니 吾道一以貫之는 오직 증자라야 능히 이에 통달할 것이니 공자가 써 가르치신 것이라 증자가 문인에게 가르쳐 가라사대 부자의 도는 충서일 뿐이라 하시니 또한 부자가 증자에게 가르치신 것과 같으니라 중용에 이른바 충서는 도에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한 것은 아래에서 배워 위로 통하는 뜻이라
<해설>
증자는 공자사상의 통일된 핵심을 충서(忠恕)라 보았다. <충 >이란 자기 양심에 충실한 것이거니와, 그것만으로는 남에게 통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지적인 동정이 필요해진다. 그것이 <서>
며 충과 서가 결합해서 한 덩어리가 된 것이 인(仁)이다.그러나 이 장은 공자와 공자의 애제자 자공과의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두 장면의 파편을 드라마틱하게 합성한 것이다. <위령공 >15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대화가 공자와 자공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공자와 자공이 유랑의 길을 헤매고 있던 적적하고도 한가로운 때였을 것이다. 그때 공자는 갑자기 옆에 있던 자공에게 묻는다.
"사야! 너는 내가 뭘 많이 배워서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러한 공자의 갑작스러운 자기 확인의 질문에 자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망히 자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님처럼 많이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겠습니까. 암 그렇구말구요. 그렇지 않단 말입니까?"
이때 공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공의 열띤 모습을 자애롭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말한다.
"사야! 그렇지 않다! 나의 도는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단다."
공자가 말하고 있는 '일(一)'이란 충서(忠恕)처럼 한 개의 단어나 한 개의 개념이 아니요, 그의 사상 전체를 전관하고 일관하는 통합성의 문제이다.
<위령공23에 자공과 공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생생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자공은 공자에게서 수많은 가르침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인가 한 마디로써 그 많은 가르침을 요약할 수 있는 금언을 가슴에 새기고 싶은 어떤 충동을 갑자기 느꼈던 모양이다. 자공은 공자님께 여쭌다.
"선생님! 제가 단 한 마디로써 종신토록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는 말문을 연다.
"그래? 서(恕)일 꺼야! 서라는 것은,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아니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자공이 원래 질문을 던진 본래적 맥락은 공자의 전체 사상의 한마디 요약이 아니라, 자기 삶의 행동지침을 요약적으로 표현한 요청이었다. 즉 그것은 개념적 축약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의 일관된 준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공자는 서를 개념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행동의 준칙으로서 제시했다.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